다테 무네모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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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테 무네모토는 다테 요시쿠니의 차남으로, 메이지 유신 이후 센다이 번의 다이묘가 되었다. 보신 전쟁 패배 후 센다이 번의 영지가 감축되어 다테 가문은 백작이 되었고, 무네모토는 이후 센다이 현 지한지를 거쳐 홋카이도 샤나 지방 지배를 맡았다. 1884년 백작 작위를 받았으며, 종삼위, 종이위로 승진했다. 1917년 사망했으며, 작위는 동생 다테 쿠니무네가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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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토 마코토는 일본 제국의 해군 군인이자 정치가로, 해군대신, 조선총독, 내각총리대신 등을 역임하며 해군력 확장, 문화 통치 추진, 만주국 승인, 국제연맹 탈퇴 등의 행적을 남겼으나 2·26 사건으로 암살당했다. - 막말 센다이번 사람 - 다카하시 고레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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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테 무네모토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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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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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다테 무네모토 (伊達宗基) |
로마자 표기 | Date Munemoto |
출생 | 1866년 8월 24일 |
출생지 | 센다이, 일본 |
사망 | 1917년 1월 27일 |
사망지 | 도쿄, 일본 |
묘소 | 센다이시의 다이넨지 |
별칭 | 류오카 (榴岡), 가쿠조 (鶴城) |
신호 | 해당사항 없음 |
계명 | 해당사항 없음 |
영명 | 해당사항 없음 |
가문 | |
씨족 | 다테 씨 |
가족 관계 | |
아버지 | 다테 요시쿠니 |
어머니 | 마쓰오카 도키요시의 딸, 미치코 |
형제자매 | 히메, 완히메, 데이마루, 무네모토, 마쓰고로, 구니무네, 모, 도쿠로쿠로 |
배우자 | 마쓰라 아키라의 딸, 마쓰라 미야코 |
자녀 | 에이코 (우에노 마사오 부인) |
양자 | 다테 구니무네 |
경력 | |
막부 | 해당사항 없음 |
주군 | 메이지 천황 |
관위 | 해당사항 없음 |
다이묘 정보 | |
번 | 무쓰 센다이번 번주 → 센다이 번지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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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대 센다이번 다이묘 | 센다이번 |
재임 기간 | 1868년 ~ 1869년 |
쇼군 | 도쿠가와 요시노부 |
이전 | 다테 요시쿠니 |
이후 | -없음- |
지번사 정보 | |
재임 기간 | 1869년 ~ 1870년 |
천황 | 메이지 천황 |
이전 | 다테 무네아쓰 |
이후 | -없음- |
다테 종가 당주 | |
대수 | 30대 |
재임 기간 | 1868년 ~ 1917년 |
이전 | 다테 요시쿠니 |
이후 | 다테 구니무네 |
다테 백작가 당주 | |
대수 | 1대 |
재임 기간 | 1884년 ~ 1917년 |
이후 | 다테 구니무네 |
2. 생애
다테 요시쿠니의 차남으로, 어린 시절 이름은 카메사부로(Kamesaburō)였다. 1868년 메이지 유신의 보신 전쟁에서 오우슈 에치 렌판 도메이(奥羽越列藩同盟)이 패배한 후, 아버지 이달 게이쿠니(伊達慶邦)는 관직을 사퇴하고 도쿄에서 은둔 생활을 하였다. 새로운 메이지 정부는 두 살 된 무네모토를 센다이 번(Sendai Domain)의 다이묘(daimyō)로 임명했지만, 반란에 참여한 것에 대한 처벌로 번의 고쿠다카(kokudaka)를 62만 석에서 28만 석으로 감봉(減封)했다. 이로 인해 다테 가문은 백작(伯爵)이 되었다. 감축된 센다이 번의 실제 실고(実高)는 그보다 더 적었으며, 10만 석으로 추정된다.
1869년, 반적봉환(版籍奉還) 이후 다이묘의 직책이 폐지되면서 무네모토는 센다이 현의 임명직 치한지(知藩事)가 되었고, 홋카이도(北海道)샤나 지방(紗那地方)의 지배도 명령받았다. 1870년, 그는 이 직책을 양자 형제인 다테 무네아쓰(Date Muneatsu)에게 넘겨주었지만, 문중 수장의 지위는 유지했다.
히라도 번의 다이묘인 마쓰라 아키라의 딸과 결혼하여 한 명의 딸을 두었다. 정실(正室)은 마쓰우라 아키라의 셋째 딸 도시코(都子)이다.
폐번치현(廃藩置県) 후, 1884년, 무네모토는 새로운 일본 귀족 제도인 가족(kazoku)에서 백작(hakushaku)에 서임되었다. 그는 1911년에 종삼위(Third Court Rank), 1917년에 종이위(Second Court Rank)로 승진했다. 1901년에는 메이지 천황의 센다이(仙台)순행(巡幸) 시, 다테 가문에 전해지는 쓰루마루(鶴丸)을 헌상했다. 다이쇼 6년(1917년)에 52세로 사망하였고, 종이위(従二位)가 추증되었다. 다테 백작가는 동생 다테 쿠니무네(Date Kunimune)에게 이어졌다.
2. 1. 가독 상속과 번주 시절
다테 무네모토는 다테 요시쿠니(Date Yoshikuni)의 차남으로, 어린 시절 이름은 카메사부로(Kamesaburō)였다. 1868년 메이지 유신의 보신 전쟁에서 오에쓰 레판 동맹이 패배한 후, 아버지 요시쿠니는 관직을 사퇴하고 도쿄에서 은둔 생활을 하였다. 새로운 메이지 정부는 두 살 된 무네모토를 센다이 번(Sendai Domain)의 다이묘(daimyō)로 임명했지만, 반란에 참여한 것에 대한 처벌로 번의 고쿠다카(kokudaka)를 62만 석에서 28만 석으로 감축했다. 이로 인해 다테 가문은 백작(伯爵)이 되었다. 감축된 센다이 번의 실제 고쿠다카는 그보다 더 적었으며, 10만 석으로 추정된다.1869년, 다이묘의 직책이 폐지되면서 무네모토는 센다이 현의 임명직 황족 총독이 되었다. 반적봉환(版籍奉還) 후, 센다이 현(仙台県) 치한지(知藩事)가 되었고, 홋카이도(北海道) 샤나 군(紗那郡) 샤나 지방의 지배도 명령받았다. 1870년, 그는 이 직책을 양자 형제인 다테 무네아쓰(Date Muneatsu)에게 넘겨주었지만, 문중 수장의 지위는 유지했다.
1884년, 무네모토는 새로운 일본 귀족 제도인 가족(kazoku)에서 백작에 서임되었다. 그는 1911년에 종삼위(Third Court Rank), 1917년에 종이위(Second Court Rank)로 승진했다. 1917년 사망하자 문중 수장의 지위는 그의 동생인 다테 쿠니무네(Date Kunimune)에게 이어졌다. 다이쇼(大正) 6년(1917년)에 52세로 사망하였고, 종이위(従二位)가 추증되었다.
2. 2. 지번사와 홋카이도 개척
1868년, 메이지 유신의 보신 전쟁에서 오우슈 에치 렌판 도메이(奥羽越列藩同盟)이 패배한 후, 아버지인 이달 게이쿠니(伊達慶邦)는 관직을 사퇴하고 도쿄에서 은둔 생활에 들어갔다. 새로운 메이지 정부는 두 살 된 무네모토를 센다이(仙台)의 번주(藩主)로 임명했지만, 반란에 참여한 것에 대한 처벌로 번의 영지(石高)를 62만 석에서 28만 석으로 감봉(減封)했다. 감축된 센다이 번의 실제 실고(実高)는 그보다 더 적었으며, 10만 석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다테 가문은 백작(伯爵)이 되었다.1869년, 반적봉환(版籍奉還) 이후 다이묘의 직책이 폐지되면서 무네모토는 센다이 현의 임명직 치한지(知藩事)가 되었고, 홋카이도(北海道)샤나 지방(紗那地方)의 지배도 명령받았다. 1870년, 그는 이 직책을 양자 형제인 무네아쓰(宗敦)에게 넘겨주었지만, 문중 수장의 지위는 유지했다.
1884년, 무네모토는 새로운 일본 귀족 제도인 가족(kazoku)에서 백작(hakushaku)에 서임되었다. 1901년에는 메이지 천황(明治天皇)의 센다이(仙台)순행(巡幸) 시, 다테 가문에 전해지는 쓰루마루(鶴丸)을 헌상했다. 그는 1911년에 종삼위(Third Court Rank), 1917년에 종이위(Second Court Rank)로 승진했다. 1917년 사망하자 문중 수장의 지위는 그의 동생인 쿠니무네(邦宗)에게 이어졌다.
2. 3. 백작과 귀족 생활
다테 요시쿠니의 차남으로 어린 시절 이름은 카메사부로(Kamesaburō)였다. 1868년, 메이지 유신의 보신 전쟁에서 오에쓰 레판 동맹이 패배한 후, 요시쿠니는 관직을 사퇴하고 도쿄에서 은둔 생활을 하였다. 새로운 메이지 정부는 두 살 된 무네모토를 센다이 번의 다이묘로 임명했지만, 반란에 참여한 것에 대한 처벌로 번의 고쿠다카를 62만 석에서 28만 석으로 감축했다. 실제 고쿠다카는 그보다 더 적었으며, 10만 석으로 추정된다. 제13대 藩주(はんしゅ) 이달 게이쿠니의 넷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센다이 번士(센다이번시) 마쓰오카 도키요시의 딸 도코(미치코)(お勝の方)이다.1869년, 새로운 정부에 의해 다이묘의 직책이 폐지되었고, 무네모토는 센다이 현의 임명직 황족 총독이 되었다. 1870년, 그는 이 직책을 양자 형제인 다테 무네아쓰에게 넘겨주었지만, 문중 수장의 지위는 유지했다. 하지만 어렸기 때문에, 원래라면 게이쿠니의 뒤를 잇는 것은 양자 무네아쓰(宗敦)였기에, 메이지 3년(1870년)에 징계 해제된 무네아쓰에게 치한지를 양위했다.
히라도 번의 다이묘인 마쓰라 아키라의 딸과 결혼하여 한 명의 딸을 두었다. 정실(正室)은 마쓰우라 아키라의 셋째 딸 도시코(都子)이다.
폐번치현 후, 1884년, 무네모토는 새로운 일본 귀족 제도인 가족(kazoku)에서 백작(hakushaku)에 서임되었다. 그는 1911년에 종삼위, 1917년에 종이위로 승진했다. 1917년 사망하자 문중 수장의 지위는 그의 동생인 다테 쿠니무네에게 이어졌다. 다이쇼 6년(1917년)에 52세로 사망했다. 종이위가 추증되었다. 다테 백작가는 동생 쿠니무네(邦宗)(게이쿠니의 일곱째 아들)가 계승했다.
메이지 34년(1901년), 메이지 천황의 센다이 시 순행 시, 다테 가문에 전해지는 쓰루마루을 헌상했다.
2. 4. 사망과 가문의 계승
1868년, 메이지 유신의 보신 전쟁에서 오에쓰 레판 동맹이 패배한 후, 아버지 요시쿠니는 관직을 사퇴하고 도쿄에서 은둔 생활을 하였다. 새로운 메이지 정부는 두 살 된 무네모토를 센다이 번의 다이묘로 임명했지만, 반란에 참여한 것에 대한 처벌로 번의 고쿠다카를 62만 석에서 28만 석으로 감축했다. 감축된 센다이 번의 실제 고쿠다카는 그보다 더 적었으며, 10만 석으로 추정된다.1869년, 새로운 정부에 의해 다이묘의 직책이 폐지되었고, 무네모토는 센다이 현의 임명직 황족 총독이 되었다. 1870년, 그는 이 직책을 양자 형제인 다테 무네아쓰에게 넘겨주었지만, 문중 수장의 지위는 유지했다.
1884년, 무네모토는 새로운 일본 귀족 제도인 가족(kazoku)에서 백작에 서임되었다. 그는 1911년에 종삼위, 1917년에 종이위로 승진했다. 1917년 사망하자 문중 수장의 지위는 그의 동생인 다테 쿠니무네에게 이어졌다.
3. 가족 관계
4. 작위 및 영전
1884년 7월 7일 백작(작위)을 수여받았다.[1] 1890년 12월 16일 정오위[4], 1894년 12월 21일 종사위[9], 1903년 12월 11일 종삼위[16], 1911년 12월 20일 정삼위[22], 1917년 1월 27일 종이위[26]에 서위되었다. 그 외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목배, 은배, 금배 등을 하사받았다.[2][3][5][6][7][8][10][11][12][13][14][15][17][18][19][20][21][23][24][25]
5. 헨기를 받은 인물
다테 모토이 (다테 쿠니나리의 아들), 다테 모토타다 (이와데야마다테 쿠니나오의 아들, 토베츠 다테가 제2대 당주), 다테 모토히로 (다테 쿠니카타의 아들), 다테 모토야스 (무쓰 시로이시씨 제34대 당주・토메 다테가 제14대 당주, 쿠니노리의 적남, 쿠니야스의 손자), 이와키 모토노리 (이와키 쿠니노리에서 개명했다고 여겨짐), 시라카와 모토히로 (시라카와 유키씨 지류・마사카 시라카와가 제11대 당주), 미사와 모토히로 (마에자와 미사와가 당주, 다테 무네쓰네의 손자), 루스 모토하루 (루스 쿠니야스의 아들)
참조
[1]
간행물
官報 第307号「叙任及辞令」
1884-07-08
[2]
간행물
官報 第699号「官庁彙報 - 褒賞」
1885-10-28
[3]
간행물
官報 第1598号「彙報 - 褒賞」
1888-10-25
[4]
간행물
官報 第2244号「叙任及辞令」
1890-12-19
[5]
간행물
官報 第2604号「彙報 - 褒賞」
1892-03-09
[6]
간행물
官報 第2881号「彙報 - 褒賞」
1893-02-08
[7]
간행물
官報 第3117号「彙報 - 褒賞」
1893-11-17
[8]
간행물
官報 第3229号「彙報 - 褒賞」
1894-04-09
[9]
간행물
官報 第3447号「叙任及辞令」
1894-12-22
[10]
간행물
官報 第3566号「彙報 - 褒賞」
1895-05-2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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官報 第4200号「彙報 - 褒賞」
1897-07-0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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官報 第4492号「彙報 - 褒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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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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官報 第4813号「彙報 - 褒賞」
1899-07-18
[15]
간행물
官報 第5507号「彙報 - 褒賞」
1901-11-09
[16]
간행물
官報 第6135号「叙任及辞令」
1903-12-12
[17]
간행물
官報 第6723号「彙報 - 褒賞」
1905-11-27
[18]
간행물
官報 第8193号「彙報 - 褒賞」
1910-10-11
[19]
간행물
官報 第8197号「彙報 - 褒賞」
1910-10-15
[20]
간행물
官報 第103号「彙報 - 褒賞」
1912-12-03
[21]
간행물
官報 第109号「彙報 - 褒賞」
1912-12-10
[22]
간행물
官報 第8552号「叙任及辞令」
1911-12-21
[23]
간행물
官報 第276号「彙報 - 褒賞」
1913-07-01
[24]
간행물
官報 第487号「彙報 - 褒賞」
1914-03-16
[25]
간행물
官報 第1144号「彙報 - 褒賞」
1916-05-26
[26]
간행물
官報 第1346号「叙任及辞令」
1917-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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